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문단 편집) == 평가 == [[천명제|누르하치]], [[숭덕제|홍타이지]]가 [[청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그들의 재위 기간 동안 청나라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북방 민족 [[만주족]]의 국가에 불과했다. 그랬던 청나라를 중원의 제국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섭정왕 도르곤이었다. 청나라가 많이 강성해졌다곤 하지만, [[만리장성]]을 돌파하여 중원의 지배자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과업을 이룩해낸 이가 도르곤이었다.[* 물론 청이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건 [[이자성]]의 [[순나라]]가 이미 내부에서부터 명을 멸망시킨 덕분도 있었다.] 도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교묘한 책략 등 여러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 끝에 베이징을 차지할 수 있었다. 사실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혼란에 빠진 그 좋은 찬스 때 청나라의 권력투쟁으로 만주와 내몽골이 중원처럼 계속 혼란에 빠졌거나 도르곤이 아닌 다른 이가 섭정 자리에 있어서 도르곤만큼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베이징에 입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아무리 청나라가 강성해졌다고 해도 국력 자체는 여전히 명나라가 앞섰고,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키기 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도르곤이 여기서 꾀를 내어 [[오삼계]]를 입발린 말로 구슬리지 않았다면 결코 산해관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청나라 역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가 아니었고, 사후엔 결국 그의 라이벌이었던 이복형 [[숭덕제|홍타이지]]의 후손들에 의해 [[부관참시]]되며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중국의 왕조에서 종종 보이듯 도르곤 역시 쿠데타를 통해 조카를 제거하고 본인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도르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순치제도 도르곤을 항상 경계했다. 오히려 도르곤이 끝내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 황부섭정왕의 자리에 만족한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도르곤이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효장문황후의 아들인 순치제를 해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중국에서는 '대청풍운'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져 히트를 쳤을 정도. 그 외 도르곤이 결국 제위에 등극하지 못한 이유로는 여러 설들이 있다. 일단 그는 팔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양황기 대신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고 효장태후라는 구심점을 통해 도르곤과 대립했다. 또한 효장태후의 뒤에 있는 몽골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팔기를 1인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러한 외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도르곤이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마음 먹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굳이 유혈사태를 벌여가며 황제가 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로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 많이 거론되기도 한다. 설령 도르곤이 피바람을 무릅쓰고 제위를 차지한다 해도 물려줄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도르곤은 자신의 제위 계승권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하고 순치제는 태자로 강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도르곤은 황부섭정왕이라는 자리에 만족하고 여생을 마쳤는데, 이것이 워낙 전례가 없는 자리였는데다가 공식적으로 황실의 종친에 불과한 처지였기 때문에 당시 유교적 관점에서 도르곤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유교 관점에서 보더라도 끝내 순치제의 제위를 유지했던 점을 오히려 높이 살 수도 있다. [[태종(조선)|조선 태종]], [[세조(조선)|조선 세조]]라는 최악의 반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도르곤은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으로 입만 건방졌지 행동 자체는 충신적 면모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도르곤은 사후, 그를 미워한 [[순치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부관참시]] 당했고, 이후에는 도르곤의 예를 경계하여 강력한 황권을 다진 청나라의 후대 황제들은 황제가 정무를 처리할 수 없을 때에 대타를 맡을 친왕, 황태후급 고위 황족을 지명하면서도 '섭정왕' 같은 직위를 암묵적으로 꺼리게 된다. 순치제는 자신이 요절하면서 [[강희제|현엽]]을 후계자로 지목하고는 태황태후의 견제를 받는 보정대신 4인을 임명하였고, [[강희제]]는 자신이 남순을 떠나면 황태자 윤잉에게 직무대행을 맡기려 했으나 여러모로 처참하게 망한 후에는 여러 아들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켰다. [[옹정제]]는 과로로 말년에 건강을 해치자 태자로 공표하지만 않았지, 사실상 누구에게나 차기 황제로 예측되던 [[건륭제|보친왕 홍력]]조차도 '감국' 자격으로만 일거리를 분담시켰다. 게을러진 말년의 건륭제는 섭정왕 따위 임명할 것 없이 본인이 태상황제가 되고 [[가경제|가친왕 영염]]에게 황위를 통째로 물려줘버렸다. 이런 직책이 실질적으로 부활한 것은 청나라 말엽의 일. [[함풍제]]의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이힌|공친왕]]과 [[동태후]], [[서태후]]가 손잡고 유아기의 [[동치제]]를 보좌하라고 임명된 보정 8대신들을 숙청한 후 공친왕이 의정왕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섭정왕이 되었으나, [[양무운동]]의 리더로 군림하던 공친왕의 권력을 견제하려던 서태후의 술수로 공친왕은 의정왕에서 수석군기대신으로 격하된 신분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서태후가 등장하는 중국 사극에선 서태후가 보정대신들과 공친왕을 욕할 때마다 "도르곤 따라하고 자빠졌네" 하는 레퍼토리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도르곤은 건륭제의 실드와 복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후세인들에게까지 섭정의 대명사이자 잠재적 역적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게다가 도르곤이 청나라의 전성기를 연 인물인 것과 달리 서태후는 안 그래도 전성기에 비해 많이 쇠퇴한 청나라를 아예 멸망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에서 도르곤과 서태후를 똑같이 비교하는 것 자체가 도르곤에 대한 고인드립이다.] 섭정왕이 없어진 대신 갓난아기 허수아비 황제를 두고 서태후가 실질적인 섭정으로 군림하는 권력구도는 서태후가 사망한 청나라의 망국까지도 감국섭정왕에 임명된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에 의해 계속되었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노 마티니(중국명 위광국(衛匡國))는 자신의 저서 《타타르 전기》에서 위아래 모두 도르곤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그를 감히 직접 마주하여 말을 꺼내지 못하였고, 그가 외출하였다 돌아올 시에는 백관이 정렬하여 그를 알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샤오이산(蕭一山)은 청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에 도르곤의 섭정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역사학자 옌총니엔은 도르곤이 [[명청교체기|명-청 교체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개국에 큰 공이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권력욕이 강하여 황부라는 극존칭까지 자칭하는 등 죽을 때까지 조카이자 황제인 순치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하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모트는 도르곤을 훌륭한 정치가요 용맹한 장군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섭정왕에 오른 뒤 오만방자해졌으며 그 오만함이 황족들과 대신들의 불안감을 야기하여 결국 도르곤 사후 그의 모든 명예를 추탈하는 데 큰 일조를 하였다고 지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